대학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인재를 선발할 능력도 없으면서, 양성을 하겠다고 한다. 지금의 대학은 대학수학능력평가가 없이는 어떤 인재도 뽑을 수 없다. 자신들이 교육해야 할 인재상을 잃어버린지 오래이고, 교육부가 학생들을 대학 입구까지 밀어 넣어 주어야 겨우겨우 돌아가는 불쌍한 교육기관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궁핍하면,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지우고 입시기관으로 변질시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고만 한다. 대학이 인재상과 비전이 명확하다면, 원하는 인재를 최적의 방식으로 선발할 수 있지만, 그런 인재 선발 시스템을 개발할 역량이 없어 고등학교만 바라보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교육부는 이에 부응해 백년지대계를 버리고 해마다 대학입시선발제도를 누덕누덕 고쳐대며 대학 입맛에 맞추어 떠먹여주고 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교육부 덕에 인재선발능력을 잃어버린 대학은 부끄러워 해야 한다. 언제까지 경쟁중심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누더기 입시제도를 교육부에 요구하며, 구차하게 빌어먹으며 살아갈텐가. 대학의 고등교육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고등학교의 교육도 아래에서부터 변화하고 있다. 대학은 지금 인구감축으로 학령인구 문제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장담컨데 한국의 대학교육은 인재선발 역량부족에서 시작하여 수준미달로 이어져, 인재들이 찾지 않는 불필요한 교육기관이 될 수 밖에 없다.
다툼과 괴롭힘이 분리되어 있는가?
학생 사이의 일회성 다툼과 지속적 괴롭힘이 그냥 학생폭력으로 묶여서는 안된다. 다툼은 문제 해결의 방식 중에 하나이다. 의견이 다를 때 사용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 처음에는 대부분 “대화”라는 평화적인 방법을 이용하지만,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말다툼이나 주먹다짐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말다툼과 주먹다짐 모두 폭력의 범주에 있지만, 문제해결의 과정에서 발생한 실험적 방법이다. 폭력은 문제해결의 나쁜 방법이며, 더 나은 방법에 대해 교육함으로써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다. 반면, 지속적이고 집단적인 괴롭힘은 교육과 무관하다. 정신건강의 문제나 범죄에 가깝다. 그러므로, 다툼과 괴롭힘의 태생적 차이를 인정하고 같은 범주에서 다루면 안된다. 철저히 분리되어 다툼은 학생부에서, 괴롭힘은 경찰서와 법원에서 다루는게 옳다.
학교급식이다, 무상급식이 아니라.
한때, 무상급식 관련 논란으로 지방자치단체의 시장이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식사제공이므로 학교급식이라고 해야 한다. 무상이라는 접두어는 비용의 지불 형태를 의미할 뿐이며, 학교급식의 본질의 측면에서 보면 적절하지 않다. ‘학교폭력’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의 자의적 해석으로 편가르기용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급조되어 언론을 통해 유포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전히 정치인 중에는 여전히 무상급식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학교급식은 자리잡은지 오래이고, 의무교육의 연장선에서 국민들에게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고 있는 유일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비용을 어떤 방식으로 충당하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무상급식이 아니라, 학교급식이다.
폭력은 ‘법’으로 처리하자.
‘학교폭력’이란 잘못 만들어진 언어로 학교와 무관해도 학교에게 책임을 떠넘기도록 짜여진 프레임을 깨야 한다. 폭력은 깔끔하게 법집행 기관에서 해결하면 된다. 가해학생의 ‘일탈’, ‘낙인’, ‘장래’, ‘교육’ 등의 언어를 가져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본질부터 따져보면 백이면 백, 적자생존을 포장한 억측이다. 인류로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면, 약자를 괴롭히기 위한 폭력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법은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고도 저지르는 악행을 막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한다. 공동체가 용인하지 않는 행태를 저질렀다면, 공동체에서 정한 법과 절차에 따라 처벌을 받는게 진정한 ‘교육적’ 시나리오다. 피해학생에게 평생의 상처를 주었다면, 가해학생에게 평생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 당연한 결과여야 한다. 학생폭력, 청소년폭력은 학교가 아니라 지엄한 법원에서 재판을 통해 집행하도록 해야 옳다.
왕따는 집단따돌림과 다르다.
만약, “우리와 같은 중학교에 다니던 윤석이 기억나? / 아, 우리반 왕따였던 윤석이?” 로 흘러가는 대화에서 별다른 불편함을 발견할 수 없다면, 당신도 ‘왕따’라는 신조어의 피해자이다. 이렇게 바꾸어 보자. “우리와 같은 중학교에 다니던 윤석이 기억나? / 아, 우리반 훈이에게 집단따돌림을 당하던 윤석이?”… 대화에서 불편함이 느껴지는가? 윤석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집단따돌림의 가해자였거나, 방관자였거나, 그의 사정을 이해하고 있는 친구였을 것이다. 학생폭력을 가십거리로 전락시키는 ‘왕따’라는 가벼운 말 대신 ‘집단따돌림’이라는 구체적이고 정확한 말을 사용하여 대화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왕따’라는 말은 집단폭력의 심각성을 추억거리 쯤으로 희석시킴으로써 폭력에 대한 오개념을 형성시키는 비교육적인 언어는 아닐까.
학생폭력으로 학교와 나머지 학생들은 엉망이 된다.
학생폭력의 처분을 아무런 힘도 없는 오롯이 학교에 떠넘기는 바람에, 학교의 처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가해학생측의 소송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피해를 입은 학생에게는 2차 가해이자, 돌이킬 수 없는 평생의 상처가 될 뿐만아니라, 해당 학년도의 학교, 학년, 학급운영이 온통 뒤죽박죽 꼬이게 된다. 교육지원청이 대신해서 처리하겠다지만, ‘학교폭력’이라고 씌워놓은 프레임 자체가 어차피 학교가 책임지고 마무리하도록 설정된 시나리오다. 조용히 배움을 이어가는 수백 배 많은 학생들을 위한 온전한 교육과정 운영은 . 폭력을 일으킨 가해학생은 반성은 커녕 법기술의 힘을 빌어 폭력을 이어가도 어쩔 수 없다. 이게 과연 교육적인 정책과 행정인가? 교육적 전문성이 느껴지는가?
결국에는 법정에서 다투게 된다.
학생폭력을 해결한답시고, 학교에서 경찰을 대동한 학교폭력위원회를 열어 소꿉장난처럼 재판을 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 낭비하는 동안 제 때 봉합하지 못한 상처는 썩을 대로 썩어버리게 마련이라, 아무리 절차와 규정을 온전히 지켜 처분을 내린다 하더라도 양측 모두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일 수 밖에 없고, 결국 많은 경우 법정공방으로 이어지게 된다.
잘못된 정의로 학교책임이 되어 버렸다.
학교폭력으로 잘못 정의되면서, 청소년폭력 = 학교책임으로 오롯이 떠넘겨졌다. 만약, 지엄한 법정에서 재판장을 통해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염치없는 가해자에게 충분히 복수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강력한 명분이 생기므로, 학교가 이를 근거로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 없이 충분히 해소할 수 있었으리라.
학교는 학생의 편일 수 밖에 없다.
학생폭력을 다룰 때, 놓쳐서는 안될 관점이 있다. 학교는 가해학생과 피해학생을 떠나 교육주체인 학생의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다. 당연히 피해를 입어 고통받는 학생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반면, 가해를 했다고 학교가 무조건 내치는게 과연 학교에게 부여된 교육의 목표에 부합하는지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학교가 이 둘의 균형점을 잡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사건은 커져서, 결국 양측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런 딜레마에 대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음에도, 온전히 학교에 떠넘기는건 백년을 내다봐야할 교육보다 비교육전문가들의 행정이 앞선 결과다.
학교는 법정이 아니고, 교사는 판사가 아니다.
학생폭력, 청소년폭력에 대해 올바른 인재를 육성해야하는 학교의 입장에서 교육적인 책임을 통감할 수는 있겠으나, 학교는 교육기관이지 법정이 아니다.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대응 매뉴얼과 관련 시행령에 따라 절차를 수행하고, 행정 처분할 수 밖에 없다. 혹시나 재확인 하자면, 교사는 교육학 전문가이지 법학 전문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