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갇혀있지 않도록 조심하자

교사는 교실에 갇히기 쉽다. 교실은 나만의 왕국이 아니다. 교사들과 교류하며 커뮤니티를 형성해야 하고, 학교 밖 친구를 통해 다양한 세상을 만나야 한다. 건강을 위해서다. 학생들에게 집중하되 몰입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자. 몰입하고 집착하다가 모든 것을 망친다. 교실에서 나와 연결하자는 목표는 초등교사커뮤니티 인디스쿨의 최초 ’닷dot’이기도 하다.

질문은 의식의 흐름이다

질문을 강제할 수 없다.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인지, “질문을 만들어 보자”, “친구에게 질문을 해보자”, “글쓴이에게 질문해 봅시다”며 모두가 달성해야 하는 활동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질문을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걸 얼마나 빨리 처리하는 능력은 개인마다 모두 다르다. 국어교과서에서 ‘질문’을 강제하고 있는데, 그 짧은 시간에 그 짧은 지문 하나로 심오한 질문까지 도출하고 서로 묻고 답하는 것은, 어른에게 시켜도 힘든 과제다.

칼춤은 이제 그만 추자

교육부의 즉흥적으로 밀어붙이는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 정책으로 혼란이 많다. 전쟁을 준비해야 할 때라는 공감대와 달리, 그저 난립한 무림고수들의 화려한 칼춤 뿐이다. 기술력이 어쩌네 저쩌네 칼춤은 이제 그만 추자. 일단 돈들여서 진행하다보면 전력과 전술은 어떻게든 짜맞추면 되지 않겠느냐고? 어려운 시절 성공전략은 그만 우려먹고, 전체를 조망해서 인재와 자원을 모으고 계획을 세우자. <그 동안 우리교육의 전산화/정보화의 역사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돌아보고> 효율적인 병법과 초식을 도입하여, 우수한 인력들을 모아 문제를 하나씩 풀어 나가보는게 어떻겠는가.

컨퍼런스 동기유발로 90년대 교실은 이제 그만

아주 불편한 장면들이 여전하다. 교육 컨퍼런스 말머리에 아직도 90년대 일제식 수업교실 사진으로, 미래교육을 위해 변화해야 한다는 캐캐묵은 동기유발은 이제 그만하자. 교사와 교실수업의 목적이 현재는 지식을 가르치는데 있으니, 배움을 유도하는 역할로 바꿔야 한다는 옛말도 그만하자. 할 말만 해도 충분하다. 미안하지만, <권력친화적 이론가들의 미려한 유행감각을 뽐내며 휘둘러대는 화려한 헛발길질>로 현장과 부모가 휘둘리는게 미래교육에 가장 큰 걸림돌인 세상이다.

인공지능을 신뢰하는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인공지능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이 말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일단, 인공지능 시스템이 기계학습의 결과로 사용자에게 보여주는 정보를 신뢰하는지 묻고 싶다. “알렉스는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두자리수 / 한자리수 나눗셈 문제에서 몫과 나머지를 72.3% 구했다” 이게 알고 있다는 말인가,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필기를 분석하여) “한 자리수 곱셈 시간이 오래 걸림. 나누기 세로셈의 자리를 맞추어 빼지 못함” 이것은 어떤가? 풀이를 하다가 잠시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거나, 펜의 정교함이 떨어져 자리수를 온전히 맞추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교실혁명이라는 폭력적인 깃발 아래,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학습자를 분석하고 맞춤형으로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다 좋다. 학습자, 분석, 맞춤형, 정보, 제공 전부다 어려운 목표다. 이걸 엮어서 가정용 개별학습지, 학원수업 서비스들이 이미 차근차근 영업 중이다. 이걸 학교, 교실, 수업과 엮어낸다기에 먼저 인공지능을 신뢰할 수 있는지 묻는 바이다.

초등학교 교과서가 너무 무겁다.

교과서 종류와 권수가 많아 무겁다는게 아니라, 책 자체가 무겁다. 풀컬러 인쇄도 해야하고, 두께도 줄이기 위해서 얇고 질긴 종이를 사용하는 까닭에 책 무게 자체가 무거워졌다. 또한, 지루하지 않도록 수업활동용 스티커 부록도 붙여놓아서, 더 무거워진다. 90년대 말, 가지고 다니는 교과서로 인해 가방이 무거워져서 아이들 키가 자라지 않는다는 학부모들의 청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교실에는 교과서를 두고 다닐 수 있는 개인 사물함이 추가되었고, 덕분에 교과서 없이 귀가한 아이들에게 내줄 과제도 사라졌다. 현재 교과서는 워크북이 결합한 형태이기 때문에, 재사용 할 수 없다. 1회용 교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사양이고, 코팅지와 스티커지 등이 혼합되어 있어서 재활용도 어렵다.

말보다 표정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의 말 보다 표정을 먼저 읽는다. 부모와 교사에게서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번개같이 읽어 들인다. 참과 거짓이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지, 싫어하는지, 사랑하는 척 하는지 꽤 정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다.

공교육/사교육 대신, 학교교육/학원교육

국가교육과정에 따른 의무교육을 포함한 국가주도의 교육을 public education 이라 하는데, 그대로 번역해 공교육이라고 부르고 있다. 공교육 public education 의 상대되는 말로 사교육 private education 을 사용하고 있다. 막상 공교육이라 해놓고 보니, 예산과 학력을 인정해줄지 말지에 따른 관리 편의성이지 교육주체를 고려한 분류는 결코 아니다. 대안학교, Wee학교, 인가/비인가학교, 공립대안학교, 사립대안학교 등 교육주체가 배움을 위해 어떤 교육기관에 속해 있더라도 관리주체는 국가여야 한다. 학생의 소속을 국가가 관리하는 개념으로 학교교육으로 고쳐부르고, 사회변화와 요구에 따라 다야한 커리큘럼을 수용하고 완수하면 학력을 인정해야 한다.

사교육도 무언가 딱 떨어지면 좋겠지만, 국가교육과정을 가르치는 대상-방법-장소-교육과정 등에 따라 private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서 공교육의 상대되는 말로 사용하기에는 규모의 비대칭이 생겨 버렸다. 신분계층이 있던 시대, 최하층계급이던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어졌던 과거를 떠올리며, 공교육과 사교육 또한 이런 식으로 누구의 책임(소유)인지에 따라 분류했던 것은 아닐까? 국가소유이니 공교육이고, 개인소유이니 사교육이라고 말이다. 사교육은 학원교육으로 부르자. 정부지원없이 교육주체의 의지에 따라 쉽게 등록할 수 있고,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모든 교육기관을 학원교육으로 분류하면 된다. 편가르고 경제력과 계층화를 떠올리는 공교육과 사교육을 버리고, 학생명단의 정부관리 유무로 학교교육과 학원교육으로 나누면 된다.

퉁치는 말이 소통을 방해한다

‘꼰대’, ‘짜증’ 같은 말이 퉁치는 말이다. ‘속상해’, ‘놀랐다’, ‘당황했다’ 등의 말을 “짜증난다” 한 단어로 퉁친다. ‘박과장님은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아’를 “박과장은 꼰대야” 한 마디로 퉁쳐버린다. 자신의 기분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니, 소통이 제대로 될리 가 없다. “영훈이? 걔는 맨날 짜증만 내서 같은 모둠이 되기 싫어” 라며 내 자신도 퉁쳐서 평가된다. 억울해도 소용 없다. 스스로 퉁치는 말을 습관처럼 사용하다 보니, 그냥 모든 일에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업무에 대한 절차적인 지시사항에도 ‘꼰대’, 내가 잘못해서 지적을 받았음에도 ‘꼰대’로 퉁쳐서 거부하다 보면, 배워야 할 일도 온전히 배우지 못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도 하나 둘 사라지게 된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 배움을 거부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어봤자 좋을게 없다.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서 배울 점만 배우면 된다. “짜증나, 저 꼰대”라며 퉁치는 말을 입밖으로 내어 누군가 듣게 된다면, 그동안 애써 쌓아왔던 평판이 바람에 재 날리듯 사라져버리게 된다.

수학익힘책이 수학베낌책이 되다.

검인정 수학익힘책 교과서의 뒷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답지가 붙어있지 않은가. 수학익힘책은 그냥 문제집이 아니다. 복습을 위해 과제를 내주거나, 평가를 위해 활용하는 엄연한 교과서이다. 분명히 수학을 어려워 하는 학생임을 알고 있었다. 주말 과제로 수학익힘책 풀이를 내주었더니 깔끔하게 연필로 답을 적고, 빨간 색연필로 채점까지 해왔다. 쉽지 않은 단원인지라 숫자만 바뀐 수학익힘책 학습지를 내어 즉석에서 다시 풀도록 해 보았다. 역시나 빈 칸과 오답이 드러났다. 정답을 보고 그냥 베껴온 것이다. 수학익힘책 뒷편에 정답지가 필요한 이유를 들어 시행한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다. 문제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